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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00일] 노란리본 너는 어디서 왔니: 광화문리본공작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지연대
조회
3,434회
작성일
21-05-19 10:19

본문

 

 

 

우리가 만난 사람

:노란 리본,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광화문리본공작소. 전춘자님을 만나다.

 

 

지난 5일,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 뒤편에 마련된 두 평 남짓한 작은 공간. 그 속에서는 이미 몇 사람이 언 손을 녹여가면서 열심히 부업(?)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들어오라고 손짓하신다. 

"잘 오셨어요." 

물론 미리 인터뷰를 요청하고 방문했지만, 신분을 밝히지 않고 들어온 우리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며 노란색 리본과 군번줄을 손에 쥐어주셨다. 덤으로 의자와 따뜻한 담요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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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참여 가능한 노란리본공작소에 열린 마음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다.

 

"'팝콘(본드 작업을 마친 노란리본)을 군번줄에 끼워서 저기에 두시면 돼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등학생과 중년 여성이 들어선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자 엄마와 함께 리본공작소를 방문한 또 다른 이들에게도 담요와 의자를 건넸다. 익숙하게 리본을 군번줄에 끼우기 시작한다. 아이의 엄마는 이미 경험이 있는 듯 능숙하게 군번줄을 끼웠다. 좌식생활이 익숙치 않은 아이가 다리가 저려온다고 말하자, 엄마는 '다리를 펴면 된다'며, 쿨하게 아이에게 리본다발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어느새 우리는 익숙하게 일상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평 남짓한 공간에는 7살 아이부터 70살 어르신까지 함께 군번줄을 끼운다. 따뜻함이 묻어나는 곳이다. 
  
여러 의문들이 생긴다. 도대체 이 수상한 리본공작소는 누가 운영하고, 대한민국의 많은 시민들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노란 리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공작소에 있던 한 분이 흔쾌이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주시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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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조금 어리둥절한 여러 용어들을 다정히 설명해놓은 문구도 있다.

팝콘을 군번줄에 끼워서 저기에 두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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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해지는 공간들에서 따뜻한 온기가 묻어난다.

 

- 리본공작소는 언제 만들어졌나.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나고 4월 23일부터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는 토요집회가 시작됐어요. 2014년 7월을 전후로 해서 유민아버지가 유가족과 함께 단식농성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몇 분이 있었죠. 시민들의 동조단식이요. 그때 천막 사진이 저한테 있어요. 카페 저쪽 천막에서 리본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우리 모두가 정신 없이 살던 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7월쯤 천막에서 리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시민들이 5천 원, 만 원씩 낸 성금으로 재료를 사고, 공간을 오가다 들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리본을 만들었죠. 이 공간도 자원봉사자들이 3, 4번을 천막을 뜯어 고쳐서 만든 거예요. 서울시에서도 보조해주고, 어떤 교수님은 토목건축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을 데리고 왔지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만든 공간입니다."

 

- 리본공작소의 운영방식이 궁금합니다. 

"정말 다양한 시민들이 방문하고, 작은 성금들이 모여 재료를 사기 시작했어요. 이 공간은 100%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여기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도 돈을 받지 않고요. 처음 공간 운영을 시작한 자원봉사자들과 6개월 단위로 돌아가며 회계, 총무를 보고 있어요. 제가 작년 7월 1일부터 12월 말까지 총무, 회계를 맡아서 살림을 했고, 2017년 넘어 오면서 다른 선생님에게 6개월 살림을 넘겼죠. 다양한 공간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각 공간에서 필요한 리본들을 공작소에서 제작하면 직접 와서 가져가시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신청하시면 3000원의 택배비만 받고 국내, 국외까지도 보내드리고 있어요.

 

조금 더 궁금해졌다. 이곳에 있는 자원봉사자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자세히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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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리본을 만들때 그 리본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다녀요. "


  
- 원래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요. 자원봉사를 전문으로 하시고 계신 건지. 

"저는 OO화재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출근하고 간단한 업무만 처리하고 이곳으로 와요. 영업은 전화로 하면 되니까요. 7시쯤 퇴근할 시간이 되면 다시 회사로 들어가요. 전화하고 편지 보내고 하죠. 6개월 동안 살림과 간사일할 때는 조금 더 참여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지요."
  
- 리본공작소를 처음 찾게 된 계기는요?

"정말 트라우마예요. 내 손자 손녀와 같은 아이들이 72시간 동안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보고 나오기 시작 한 거죠. 초창기부터. 제가 아마추어 사진작가예요. 카메라를 들고 4월 21일 청계광장의 첫 번째 집회부터 기록했어요. 어느 날은 집회 끝나고 나서 포토타임하러 올라갔는데, 기록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가족을 돕거나, 유가족 편에서 무엇을 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를 와보니 리본 만드는 사람들이 있던 거죠. 이곳에 자주 오다보니 저도 점차 관여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카메라를 놓고 오로지 공작소 일만 기록해서 매일 페이스북에 남기고 있어요." 
  
- 리본공작소에서 일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없나요?

"처음에는 비닐 하나 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저녁이었는데, 술 취한 취객들이 와서 빨갱이들이 왜 여기 있느냐고, 이북으로 가라고... 이쪽으로 이것저것 던지고요. 처음에는 말도 안 걸었죠. 대꾸하고 상종할 필요도 없던 거죠. 불쌍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안 되겠더라고요. 저도 같이 싸워요. '나도 할머니다. 내 손주일 수도 있었다. 너흰 손주도 없냐' 소리 지르면 가요. 환자같이 생긴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오히려 봉변당할 것 같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해요(인터뷰 내내, 공작소 옆에선 어버이연합이 애국가를 불렀다).
  
아이들이 희망이에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 오세요.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아이들이 500원짜리 하나 가지고 와서 리본 만드는 데 보태달라고 하기도 하고. 1000원짜리를 주머니에 접어 오는 아이도 있고요. 꼬깃꼬깃한 돈을 말이죠. 그럼 저희는 한 명 한 명, 후원장부에 늘 적고 있어요. 역사잖아요. 이 한 순간, 순간이 말이죠." 

 

- 나에게 세월호란?

"호스피스 병동 로비음악회, 문화사역자로 자원봉사를 해본 적이 있어요. 오지 음악회 등으로 청년들 데리고 가서 제 주머니도 잘 털지만, 남의 주머니도 잘 털어요. 기획안 써서 가지고 가서, 음악하는 친구들 경비라도 대줄 수 있도록 지원금을 얻어오는 거죠. 그래서 소외된 지역도 찾아가고 했던 거죠. 
  
그런데 세월호를 만나면서 조금 제 인생이 뒤집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세월호는 정치와 기업과 결탁해서 아이들의 꿈을 물거품을 만든 거죠. 부모들이 17년 이후에 아이들을 못 보는 거잖아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 살, 두 살의 역사가 없어진 거죠. 이젠 엄마가 아이들 시집보낼 수도 없고, 손자를 볼 수도 없어요. 손자들 학교 가는 것도 못 보고요. 이 아이들이 대학가는 것을 엄마, 아빠들이 못 보는 거예요. 
  
부끄러운 말일지 모르지만, 광우병 촛불집회 때 죄송하게도 저는 '고기 안 먹으면 되지, 고기 먹는다고 다 병 걸리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극히 개인주의예요. 정치에도 관심도 없었어요. 잘 모르니까. 투표하라고 종이 오면, 누가 조금 더 나쁜 짓을 덜했나. 그냥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세월호 터지고 왔다갔다하면서 보니 내가 죄인인 거예요. 내가 무관심했고, 나와서 함께하지 못했던 것들이 죄로 다가오는 거예요. 부끄러운 어른으로 산 거예요. 나는 나름대로 잘 산다고,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몸부림쳤는데 그저 울타리 속에서 살아온 거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지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끈질기게 싸워서 바꿔야 돼요. 우리가 이승만 정권이 들어왔을 때 일제에 부역한 사람을 뽑기 위해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그게 폐기됐어요. 내보내야 할 사람들이 명칭만 바뀌었지요. 제대로 항거해보지 못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정점을 찍어야 돼요. 절대로 물러서면 안 돼요. 이제 시민특조위가 결사되는데, 끝까지 가야 돼요. 내 자식들에게는 세월호 이전처럼 교육시킬 수 없고, 키울 수 없어요.
  
물론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죠. 몇몇 유가족들이 영국과 독일을 다녀왔는데 어떤 사건이 밝혀내지기까지 36년의 시간이 걸렸데요. 완벽히 책임을 묻고 해결하는데 말이죠. 세월호가 36년이 가면 안 되죠. 제가 살아있는 동안 해결해야 합니다. 앞으로 리본공작소에 많은 후원 부탁드려요. 가능하면 물품으로, 에바지(EVA), 본드, 군번줄 등을 구매해서 보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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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00일을 맞이하며

세월호 집회에 나가면 '미안해'라는 피켓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왜 미안했을까. 어쩌면 그녀의 답처럼 우리도 무관심해서, 그냥 나만 이곳에서 살아남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더욱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많은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라며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노란리본은 7살 아이의 손에서, 엄마의 손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 없이 모인 모든 미안한 시민들의 손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들 방학을 맞이하여, 점심시간에 나온 직장인들, 지나가던 시민들, 대학생들 모두가 함께 노란리본공작소에 세월호 1000일을 맞이하여 함께해요. (협소한 공간이므로, 양해부탁드립니다^^) 특히나 우리 사회복지연대의 회원분들은 광화문에 가시면 그저 인사하고 함께 앉아서 몇분이라도 담소를 나누시길 강추합니다.  가끔 촛불은행에서 발행한 알바비도 지급한다는건 안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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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노란리본을 주변 이들과 함께 나누세요. 

 

노란리본을 보내드립니다. 노란리본 공작소에 신청하는 링크 (구글 신청)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2OibGbPCK6OgQ-3dng8vo_aUTmi2qwndAf77BZx0Jn2LKlg/viewform

 

페이스북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 응원메세지를 남겨주세요.

https://www.facebook.com/pages/%EA%B4%91%ED%99%94%EB%AC%B8%EB%85%B8%EB%9E%80%EB%A6%AC%EB%B3%B8%EA%B3%B5%EC%9E%91%EC%86%8C/342930055904742

 

서울복지시민연대 (노란리본받기 링크)

http://seoulwelfare.org/bizinfo3/23812

 

오마이뉴스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http://omn.kr/m1ee

 

 

*노란리본공작소 참여방법

 

장소: 광화문 광장

봉사시간: 평일(월-목) 9시 – 11시 / 금, 토, 일 9시 – 새벽 12시

봉사대상: 누구나 언제든 참여 가능합니다. 잠깐이라도 함께해요.

 

 

 

 

 

2017. 01. 05

@한인정(팔메), 권경욱(동주) 활동가

: 본글은 서울복지시민연대의 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의 칼럼으로 동시 게재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