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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 9호] 쓰기 싫은 칼럼 - 유병언과 노숙인의 그 씁쓸한 비유, 왜 하필 노숙인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지연대
조회
3,531회
작성일
21-05-23 17: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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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칼럼 쓰기 싫다.

서울복지시민연대의 강상준 사무국장에게서 칼럼 요청을 받았다. 얼마 전 세월호 참사의 사회적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유병언이 그가 소유해왔던 별장 인근의 야산에서 숨진채 발견되었고, ‘유병언이 노숙인으로 발견’되었다는 식의 비유가 난무하는 언론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몇몇 언론사에서는 필자에게 이 사안에 대해서 인터뷰를 요청해오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유명인사가 거리에서 시위 등의 농성을 하거나, 이번처럼 숨진 채 발견될 경우 언론에 의해 노숙인으로 비유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언론에서 이에 대해 전문가로서 의견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노숙인으로 불리우는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들에 대해서 내가 무슨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말 한마디를 왜곡하고 의미부여 하는 최근 언론의 모습에 내가 무슨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 이런 인터뷰나 칼럼은 응하기가 참 어렵다. 워낙 졸필인데다가, 이 글이 많이 읽혀져 또다른 논란을 만들어 낼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복지시민연대와의 의리상 저버릴 수 없고, 단지 그러한 이슈들이 내가 쓰는 글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고자 한다.

 

# 유병언이 노숙인입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묻는다. 유병언이 과연 노숙인인가? 그 사람이 가난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그로 인해 주거를 상실하고, 실직을 당하고 가족해체를 경험하며 거리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가? 하다못해 노숙인복지시설이라는 곳에서 밤을 보내본 적이라도 있는가? 쪽방 같은 열악하디 열악한 거처에 머물러본 적이 있는가?

대다수의 독자들은 한 종교교파의 대부이며, 거부인 유병언이 ‘그럴리 없다’라는 대답을 할 것이며 필자 또한 동일한 생각이다. 그런데 왜 언론은 유병언을 비롯한 몇몇 유명인사들의 노숙행태를 노숙인과 비유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이용하여 조롱하듯 보도할까. 그저 그들의 컨텐츠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늘리고, 몇몇 사람들이 원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감을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유병언과 노숙인의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그 동안 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노숙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일부 언론의 보도로 인해 증폭되는 모습이었고, 마치 유병언과 노숙인을 ‘유사한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여 관심을 전환하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희석하는 모양새가 다분했던 것이 사실이기에 이러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툭하면’ 노숙인, ‘애매하면’ 노숙인

몇 년전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언론은 ‘노숙인 행색'의 범인이 찍힌 CCTV를 근거삼아 서울역과 영등포역의 거리와 시설을 마구잡이로 검문검색 하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범인은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으로 단정하고 몇몇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조하듯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그 상황에서 극단적인 거리생활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피할 곳도 없이 언론이 생각하는 대로 사건의 가해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더 과거로 들어가 대구지하철화재참사 때도 다르지 않았다. 방화의 용의자가‘남루한 차림’이었다는 목격자의 진술과 CCTV화면을 근거로 대구시 일대에서 배회하는 노숙인을 ‘쥐잡 듯’ 수색하고 다녔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범인은 노숙인이 아니었다. 얼마 전, 코레일에서는 몇몇 ‘노숙인으로 보이는’ 취객들의 행패와 민원 등으로 인해 겨울을 앞두고 노숙인을 역사밖으로 퇴출시키는 정책을 펼쳐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특정한 관련의 근거가 없음에도 툭하면 언론에 의해 상황의 중심에 서는 사람들, 이미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이 노숙생활로 접어들기까지 겪어왔던 고통을 이해하려는 배려는 찾기 어렵다. 애매하면 그들의 속을 뒤져보고 아니면 모른척하는 언론의 행태는 사회로 다시 돌아가야할 그들을 더욱 배제하게 하는 난폭한 폭력이나 다름없다. 

 

# 노숙인의 문제는 빈곤의 문제, 언론의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노숙인은 극한 빈곤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실직과 주거의 상실, 가족의 해체 등 사회적,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사적’공간에서 ‘공적’공간인 거리나 공원으로 떠밀려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사회로 재진입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은 당연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경험한 고통은 배려받아야 한다. 언론이 가볍게 다루며 한낱 이슈거리로 언급하기에는 그들이 경험한 상실의 고통은 너무나도 크며,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부 자극적인 사건의 비유대상으로 가볍게 활용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유병언이 노숙인으로 비유되는 기사가 난 이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서 시위하는 유가족을 어떤 국회의원이 또다시 노숙인에 비유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듯 언론에서는 그 말을 받아 기사화 했다. 세월호 참사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노숙인에 빗대어진 셈이고, 이제는 누가 또 노숙인에 비유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언제까지 이런 웃지 못할 상황들이 반복될 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정론을 위한 저널리즘을 고민하는 언론이라면 이제 노숙인을 ‘심심풀이 땅콩’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다루는 행태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제발 나에게 유병언이 노숙상태에서 발견된 상황에 대해 묻지 좀 말아 달라. 적어도 그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빈곤한 노숙인이 아닐 뿐더러, 설사 도주 중에 잠시 노숙생활을 했다고 할 지라도, 그것에 관해 관심의 여지가 있을 만큼 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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