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에 읽는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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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복지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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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7회
- 작성일
- 22-05-21 16:18
본문
책을 읽으며 머리속에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분명 책제목은 논어인데 언제 논어를 접하게 되는지였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공자의 논어였지 저자 최종엽의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자 본인은 평소 정치를 통해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오십 넘어 그토록 바랐던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십을 지천명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천명, 불혹 모두 공자의 자기 기준에서 정한 것이다. 따라서 지천명이니 불혹이니 이런 용어를 인용하며 당위성을 설파할 때 굳이 따를 필요 없고 정당성도 빈약하다.
저자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기준을 만들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기준이 완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가 만든 기준만이 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모든 세상만사는 자신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가짐만 다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궁금하다. 일단 나는 공허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도 그렇게 살아낼 능력이 내 안에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왜 사람들이 당연한 말을 들을 때 공자왈, 맹자왈 하는지 알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할 능력이 내 안에 없기 때문이다.
책의 중심 사상은 ‘나’이다.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개인의 성취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사회나 조직, 구조, 체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생이모작, 50이라는 나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먹고 사는 데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한 환경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력 부족을 탓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평판 조회했을 때, 자로가 공자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못한 것을 가지고 공자가 뭐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확한 뉘앙스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자도 속세에 찌들어 있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혹, 지천명, 이순... 납득이 안 간다.